시간이 없다는 가장 완벽한 거짓말
2월이다. 슬슬 불안해지는 시기다.
1월 1일에 세웠던 계획들—운동, 독서, 영어 공부, 부업, 블로그… 그 목록이 지금 어디 있는가. 대개는 이미 희미해졌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변명이 자란다. “요즘 회사가 바빠서.” “연초라 미팅이 많아서.” “이번 주만 지나면 시작해야지.”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이 변명이 완벽한 거짓말이라면?
변호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주 의원까지 하던 남자가, 그 와중에 베스트셀러를 썼다면? 그리고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같은 루틴을 고수하고 있다면?
변호사가 새벽에 쓴 소설
존 그리샴(John Grisham). 한국에서는 톰 크루즈 주연 영화 《파트너(The Firm, 1993)》로 더 익숙할 수 있다. 《펠리컨 브리프》, 《레인메이커》도 그의 원작이다. 전 세계에서 5억 부 이상 팔린 법정 스릴러의 제왕. 52권의 소설을 썼고, 대부분이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올해 70세인 그는 여전히 매년 한 권을 ‘생산’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그가 어떻게 작가가 됐는지다.
1980년대 후반, 그는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형사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동시에 미시시피 주 하원의원이기도 했다. 주 60~70시간을 일하는 삶.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글을 쓸 시간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리샴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조용한 때였다.
오전 5시부터 8시 30분이나 9시까지, 그 시간만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
3년이 걸렸다. 매일 새벽, 한 페이지씩. 그렇게 첫 소설 《타임 투 킬(A Time to Kill)》이 완성됐다. 출판사 28곳에서 거절당한 뒤 겨우 5,000부만 출간됐고 거의 팔리지 않았다. 실패였다.
하지만 그는 원고를 탈고한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소설을 썼다. 그게 《파트너(The Firm)》다. 이 책이 터졌고, 톰 크루즈가 영화로 만들었고, 그는 전업 작가가 됐다.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바뀌지 않은 것
여기서 끝나면 뻔한 이야기다.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진짜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그리샴은 이제 억만장자다. 시간도 공간도 자유다. 농장에 개인 집필실까지 있다. 하루 종일 써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오전 7시쯤 시작해서 10~11시에 멈춘다. 주 5일. 1월 1일에 새 소설을 시작해서 7월쯤 탈고한다. 매년 같은 패턴이다.
그는 말했다.
“루틴이 전부다. 글쓰기 루틴을 제2의 본성처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7시 30분쯤 시작한다. 22년 동안 같은 작은 사무실, 같은 책상, 같은 컴퓨터, 같은 커피. 전화도 없고, 팩스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된다. 나는 오프라인으로 일한다. 처음 3시간은 완전히 고치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커피. 같은 컵. 같은 자리. 같은 시간.
시간과 돈이 넘치는데, 왜 그는 변호사 시절의 빡빡한 루틴을 스스로 강제하는 걸까?
뇌는 배터리다: 결정은 ‘에너지’를 먹는다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뇌가 한정 자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 특히 복잡한 사고와 자제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은 배터리처럼 작동한다. 결정을 내릴수록 에너지가 소모된다. 사회심리학자 Roy Baumeister는 이를 ‘자아 고갈(Ego Depletion)’이라고 불렀다. 이 이론 자체는 재현 실험에서 논란이 있지만, “결정을 많이 할수록 이후 판단의 질이 떨어진다(결정 피로)”는 현상은 널리 관찰된다.
우리는 하루에 수백~수천 개의 결정을 한다.
아침에 뭘 입을지, 뭘 먹을지, 어떤 이메일부터 볼지. 사소해 보이지만 쌓인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뇌는 지쳐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미 배터리가 바닥인 상태다.
그래서 ‘고품질 인지 자원’이 가장 쌩쌩한 시간은 대개 아침이다.
그리샴의 전략이 보이는가?
그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인지 시간을, “남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비싼 시간에 글쓰기에 먼저 투자했다. 퇴근 후가 아니라 출근 전이다. 그리고 11시쯤 되면 가차 없이 멈췄다. 뇌가 지치기 전에.
같은 커피를 마시는 이유도 같다.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실까?” 같은 사소한 결정조차 뇌의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그래서 그는 선택지를 없앴다. 사소한 의사결정을 0으로 만들어, 글쓰기라는 하나의 목표에만 에너지를 몰아준다.
스티브 잡스가 같은 옷을 입고, 오바마가 식단 선택을 최소화한 것과 같은 원리다.
시간은 늘어나면, 일도 늘어난다
여기서 더 날카로운 질문이 나온다.
“회사만 그만두면 할 수 있을 텐데.”
“전업이 되면 마음껏 할 수 있을 텐데.”
시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
하지만 1955년, 영국의 역사학자 C. Northcote Parkinson은 《The Economist》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일은 주어진 시간만큼 늘어난다.”
(Work expands to fill the time available for its completion)
2시간이면 끝낼 일을 4시간 잡으면, 결국 4시간을 쓴다. 더 조사하고, 더 고민하고, 더 미루고. 시간이 있으니까.
그리샴도 마찬가지였다. 변호사 시절, 글쓰기 시간은 새벽 3~4시간뿐이었다. 그 시간을 놓치면 그날은 한 줄도 못 썼다. 절박함이 집중을 만들었다. 선택과 집중이 강제됐다.
그런데 전업 작가가 되면서 시간이 무한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무너진다. “영감이 올 때 써야지.” “오후에 써도 되잖아.” 결국 아무것도 안 쓴다.
그리샴은 달랐다. 시간이 무한해져도 시간을 유한하게 만든 것이다. 마치 여전히 9시에 법원에 가야 하는 사람처럼.
그게 그가 40년 가까이 정상에서 “생산”해온 이유다.
당신의 7-11은 언제인가?
3~4시간을 내라는 말이 아니다. 30분이면 된다.
그리샴은 이렇게 조언한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라. 200단어 정도다. 2년이면 소설 한 권이 된다.”
문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확보의 방식이다.
“시간이 생기면 하겠다”는 말은, 사실상 “영원히 안 하겠다”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 운동할 것 같은가?
은퇴하면 책을 쓸 것 같은가?
파킨슨의 법칙은 냉정하게 말한다. 시간이 많아지면 할 일도 그만큼 늘어난다.
존 그리샴은 시간이 없어서 작가가 됐다. 그리고 시간이 생긴 뒤에도, 시간을 없는 척했다.
2월이다. 새해 계획이 흐지부지되기 딱 좋은 시기다.
정말 시간이 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 포기할 핑계를 찾지 못한 건가?
당신의 7-11은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