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된 가짜 반대 세력 : 그들의 전술 2편
2026-01-18
밤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종종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 했는데… 그 ‘일’은 대체 언제 오는 걸까?”
“저 사람들은 끝내주게 맞서는 것 같은데, 왜 아무 결말도 없지?”
“저 사람은 누구 편이야. 왜 이렇게 애매하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묘한 피로가 쌓입니다. 표정은 엄숙하고, 단어는 전쟁처럼 날이 서 있고, 화면은 늘 긴박한데—정작 우리의 삶은, 그리고 현실은,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듯합니다.
불안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라앉고, 그 잔잔함을 확인할 틈도 없이 또 다른 파도가 덮쳐옵니다. 그렇게 반복되면 사람은 결국, 문제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잃습니다. 판단은 흐려지고, 긴장에 익숙해지고, “모르겠다”라는 말이 가장 편한 결론이 됩니다.
나는 이 ‘지침’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설득해서 꺾는 것이 아니라, 지치게 해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방식.
싸움이 끝나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싸움 때문에 무너지는 것.
이런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오래된 시간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습니다.
1952년 9월 8일. 냉전의 숨결이 공기처럼 사회를 덮고 있던 시절, 미국 해군 내부 교육용 강연이 열렸고—오늘날 기밀 해제로 공개되었다고 알려진 자료들 속에서—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심리전의 원리가 언급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원리는 단순합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섬뜩합니다.
‘뜨겁게 만들고, 차갑게 만들라.’
오늘은 당장 전쟁이 터질 것처럼 세상을 달아오르게 하고,
내일은 평화와 협상이 문 앞까지 온 것처럼 숨을 돌리게 합니다.
위기—공포—긴장—분노. 그리고 곧바로,
안도—희망—대화—타협.
이 온도차가 반복되면 사람의 정신은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립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따지는 힘보다, 흔들림을 견디는 체력이 먼저 고갈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진실’이 아니라 ‘피로에서 벗어나는 길’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누가 옳은지보다 누가 더 시끄러운지, 무엇이 사실인지보다 무엇이 더 그럴듯한지, 무엇이 중요한지보다 무엇이 더 자극적인지—그것들이 세상을 끌고 갑니다.
더 낯설고도 불편한 지점은, 이런 방식이 “상대의 언론”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입니다.
자기 편의 매체는 쉽게 의심받지만, “객관적”이라고 믿는 상대편의 언론은 오히려 경계가 느슨해지니까요. 그래서 상대의 반응을 연구하고, 상대가 좋아할 만한 소재를 흘리고, 상대가 반응할 타이밍에 행동함으로써, 상대가 스스로 뜨거움과 차가움을 번갈아가며 생산하도록 ‘환경’을 설계한다—이런 이야기가 따라붙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꺾입니다.
누군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보다, 내가 스스로 흔들렸다는 자각이 사람을 더 깊게 무너뜨립니다.
“내가, 내 손으로, 내 판단으로… 나를 지치게 만들었구나.”
그 깨달음은 치욕에 가깝고, 치욕은 사람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래된 주장과 마주치게 됩니다.
망명자, 정보전, ‘연출된 반대 세력’이라는 단어들—어떤 책들은, 억압만으로는 반대 세력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반대를 ‘관리’**하려는 시도를 언급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진짜 반대가 커지기 전에, 내부로 침투해 흐름을 유도하고 통제한다.
겉으로는 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종되는 ‘가짜 반대’를 만들어 분열과 혼란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이 서사에서 가장 잔인한 조건은, “그럴듯함”을 위해 반드시 진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말단에는 순수한 문제의식으로 참여한 이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진심은 도구가 되며, 때로는 희생이 됩니다.
진짜 눈물이 있을 때, 연출은 더 진짜가 됩니다. 진짜 분노가 있을 때, 조종은 더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선의를 빌려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느낌.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래서 끝내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이 끝없는 대립과 혼란은 정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혹은 어떤 구조가, 우리의 반응을 계산해가며 이 파도를 만들고 있는 걸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질문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때로는 우연의 연쇄가 마치 “설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의심은 필요하지만, 의심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피로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조건 믿기”도, “무조건 부정하기”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체력을 지키는 방식으로 현실을 읽는 능력입니다.
뜨거운 날에는, 뉴스의 온도와 내 마음의 온도를 분리하기
차가운 날에는, 안도의 달콤함에 판단을 맡기지 않기
무엇보다, “모르겠다”가 되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춰 숨 고르기
어느 소설 속 문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은 다수가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말을, ‘다수’와 싸우라는 주문으로 읽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은, 내가 지치지 않는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가려는 태도다.
누가 소리치든, 어떤 파도가 오든, 나는 내 안의 작은 등불을 꺼뜨리지 않겠다는 결심.
그 결심이야말로,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우리가 끝내 잃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아하게, 조용히, 오래 살아남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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